정조유신 제6부 경위(經緯)
29화제39장 돈의 전쟁
넷 — 그런데 무너지지 않았다
정전 이후, 세계는 조선을 금융에서 몰아내려 했다.

몰아내지 못했다.
『마카오 협정』 제3조는 경위결제망을 국제 공동 관리로 이관한다고 규정했다.
이관은 되었다. 관리 기구가 생겼고 이사회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그 망을 실제로 돌리는 사람들은 조선 사람이었다. 육십 년 동안 그 일만 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망 위에서 돌아가는 회계 양식과 결제 규칙과 신용 평가 방식이 전부 조선 것이었다.
『국제결제기구 창립 실무보고』 1946년.
— 우리는 조선의 지배를 끝내기 위해 이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 그리고 우리는 조선의 방식으로 이 기구를 운영합니다. 다른 방식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우리 직원 사백열두 명 중 조선 출신이 백사십칠 명입니다. 우리는 그들 없이 이 기구를 돌릴 수 없습니다.
— 이 보고서를 쓰는 것이 부끄럽지만, 사실을 적는 것이 우리가 조선에서 배운 첫 번째 규칙입니다.
2027년 현재, 세계 국제 결제의 표준 회계 양식은 여전히 조선 제국이 1867년에 만든 것의 직계다.
조선 제국은 없어졌다.
조선 제국의 장부는 남았다.
『만국경위회 창립 규약』 경진년(1880) 제1조
— 본 회는 세계의 전신·전화·무선 통신에 관한 규격, 주파, 부호, 요금, 그리고 회선 접속의 표준을 정한다.
— 제12조. 본 회의 결정은 회원국을 구속한다.
— 제19조. 회원 자격의 정지는 이사회 과반의 의결로 한다.
※ 이사회는 아홉 석이며, 그중 다섯이 조선 제국에 배정되었다.
전신 다음에 온 것은 목소리였다.
기유년(1849), 조선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선을 타고 갔다.
원리는 전신과 같았다. 다만 전류를 끊었다 이었다 하는 대신, 소리의 떨림에 맞춰 전류의 세기를 계속 바꾸는 것이었다.
먼저 이해한 사람은 얀 안복이었다. 그때 마흔여덟. 그는 유리를 불다 전지를 만들었고 전지에서 전신으로 갔고 전신에서 목소리로 갔다.
그가 첫 통화에서 한 말이 기록에 남아 있다. 삼척 격물소 제1실에서 제7실로, 백이십 보 거리였다.
— 들리시오?
— 들립니다.
— …목소리가 이상하오.
— 총재님 목소리 맞습니다.
— 내 목소리가 이런가.
벨이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1876년이다. 스물일곱 해.
무선은 더 극적이었다.
『만물지서』 중권 제구권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 전기와 자기가 같은 것이라면, 그것들은 서로를 낳으며 저 혼자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즉 선 없이 간다.
— 그것은 빛과 같은 것이며, 다만 훨씬 긴 파(波)다. 빛이 눈에 보이는 파라면 이것은 눈에 안 보이는 파다.
— 만드는 법은 아마 이러하다. 전기를 아주 빠르게 켰다 껐다 하면 그 파가 생긴다. 받는 법은 그 파에 맞춰 떨리는 것을 두는 것이다.
— 이것이 참인지 나는 실험으로 확인한 적이 없다. 다만 참일 것이다.
무오년(1858), 조선 격물소가 그 파를 만들어 방을 건너 보냈다.
임술년(1862), 삼십 리를 보냈다.
경오년(1870), 바다를 건넜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무술년(1898), 태평양을 건넜다.
무선이 조선에 준 것은 세 가지다.
하나, 함대.
조선 해군은 신묘년(1891)부터 함대 전체가 무선으로 이어졌다. 흩어진 배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둘, 방송.
병신년(1896), 서울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무선으로 뿌려졌다. 받는 자를 정하지 않고 그냥 뿌리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쓸모를 아무도 몰랐다.
십 년 뒤 조선 경위권 전역에 방송이 깔렸다.
방송이 무엇을 했는가.
— 매일 아침 여섯 시에 곡물 시세와 날씨가 나갔다. 농부가 팔 때를 알게 되었다.
— 매일 저녁 여덟 시에 학당 강의가 나갔다. 학교에 못 간 사람이 글을 배웠다.
— 역병이 돌면 그날로 온 권역이 알았다.
— 그리고 조선말이 퍼졌다.
마지막 것이 가장 컸다.
방송 언어는 조선어였다. 자바의 농부와 만주의 광부와 인도차이나의 철도원이 매일 같은 목소리를 들었고, 이십 년 만에 경위권의 공용어가 생겼다.
이것은 강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서 매를 때린 시기도 있었으나 방송이 그것보다 훨씬 강했다. 사람들은 조선말을 알아야 시세를 알 수 있었으므로 배웠다.
셋, 그리고 조선의 눈이자 목이었던 것.
『제국 방송원 내규』, 신해년(1911).
— 방송은 다음의 것을 내보내지 아니한다.
一. 확정되지 아니한 사망자 수
二. 진행 중인 군사 작전
三. 경위권 내의 소요에 관한 보도
四. 본원이 판단하기에 백성의 사기를 해치는 것
이 넷째 항목이 이십칠 년 뒤에 제국을 죽인다.

갈라진 하늘
대서양동맹은 조선의 방송망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만들었다.
1892년, 동맹은 조선 표준과 호환되지 않는 무선 규격을 채택한다. 주파수 대역도, 변조 방식도, 부호도 달랐다.
기술적으로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두 규격이 병존하면 세계 전체가 손해였다.
정치적으로는 정확한 선택이었다.
『대서양동맹 통신위원회 각서』 1892년.
— 만국경위회 이사회 아홉 석 중 다섯이 조선입니다. 우리가 그 규격을 쓰는 한 우리는 조선의 허락 아래 말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열등한 규격을 쓰기로 합니다. 열등하지만 우리 것입니다.
— 이것이 앞으로 오십 년 동안 우리가 조선에 대해 취할 태도의 원형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세계의 하늘이 둘로 갈라졌다.
조선의 주파와 동맹의 주파가 서로 닿지 않았다. 두 세계는 서로의 방송을 듣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은 동맹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고, 동맹 사람들은 조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사십사 년 동안 그랬다.
그리고 1936년 사월, 콜롬보가 사라진 지 이레 뒤.
대서양동맹이 사십사 년 만에 처음으로 조선 규격으로 방송했다.
준비하는 데 이 년이 걸렸다고 한다. 몰래 조선 규격 송신기를 만들었고, 인도양의 배 세 척과 아프리카 동해안 세 곳에 설치했다.
내용은 오국 공동 성명 전문이었다.
— 조선의 지배를 받는 이억의 사람들에게 이 성명을 전한다.
— 여러분을 지배하는 자들은, 여러분이 있는 곳에만 그 불을 떨어뜨릴 수 있다.
조선어였다.
경위권 전역이 알아들었다.
조선이 백사십 년 동안 세계에 깔아 준 그 망을 타고, 조선의 말로 왔다.
『제국 방송원 긴급 각서』 1936년 4월 25일.
— 신들이 아뢰옵니다. 어제 새벽부터 우리 주파에 적의 방송이 들어오고 있사옵니다.
— 방해 전파를 쏘고 있으나 완전히 막지 못하옵니다. 우리 방송망이 너무 넓어서이옵니다. 우리가 이십 년에 걸쳐 세운 수신기가 경위권에 이천사백만 대 있사옵니다.
— 신들은 이 이천사백만 대를 회수할 방법이 없사옵니다.
— 그리고 아뢰옵기 두려우나, 회수한다 하여도 문제가 남사옵니다. 우리 백성은 매일 아침 곡물 시세를 방송으로 듣고 삽니다. 방송을 끄면 저들이 우리를 의심하옵니다.
— 우리가 저들에게 준 것이 오늘 우리를 치고 있사옵니다.
— 신들은 이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음을 아뢰옵니다.
『제국 통계원 인구 장기추계』 기해년(1899)
— 신들이 오늘 아뢰는 것은 지금까지 어느 나라의 통계 기관도 아뢴 적이 없는 종류의 보고이옵니다.
— 우리 나라의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사옵니다.
전쟁도 역병도 기근도 없이 줄어들고 있사옵니다.
조선 제국이 왜 남의 땅을 가져야 했는가.
교과서는 자원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유황과 고무와 기름 때문이라고.
절반만 맞다.
나머지 절반은 사람이다.
하나 — 세계 최초의 저출산
조선 본토의 인구는 이렇게 움직였다.
| 연도 | 인구 | 여자 하나가 낳는 아이 수 |
|---|---|---|
| 1800 | 1,620만 | 6.1 |
| 1840 | 2,050만 | 5.8 |
| 1870 | 3,110만 | 4.9 |
| 1890 | 3,940만 | 3.4 |
| 1910 | 4,410만 | 2.1 |
| 1930 | 4,600만 | 1.6 |
1910년에 조선은 인구 유지선을 밑돌았다.
원래의 역사에서 어느 나라도 1970년대 이전에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육십 년 빨랐다.
이유는 조선이 만든 것들이었다.
아이가 죽지 않게 되었다. 우두와 소독과 항생제 덕분에 다섯 살까지 사는 아이의 비율이 오십오 퍼센트에서 구십사 퍼센트가 되었다. 사람들은 여섯을 낳아 셋을 잃던 습관을 버리고 둘을 낳아 둘을 키웠다.
아이가 돈이 되지 않게 되었다. 농사에서 아이는 일손이었다. 공장에서 아이는 『공장 보호 조목』 때문에 쓸 수 없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값이 올랐다. 조선의 학제는 십 년이었고 상급 학교는 육 년이 더 있었다. 아이 하나를 기르는 비용이 농경 시대의 열두 배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가 일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장 컸다.
『삼척약조』 제1조 — 재고 묻지 않는다 — 는 백 년에 걸쳐 조선 사회를 뒤집었다. 최연이 조선 최초의 여성 관원이 된 것이 병진년(1796)이다. 백 년 뒤 조선 제국의 기술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은 삼십일 퍼센트였다.
같은 시기 영국은 이 퍼센트였다.
기술직 여성의 출산율은 1.2였다.
기술직 여성의 출산율은 1.2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