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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조선

정조 독살설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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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1800년 등창을 앓다 승하했다. 독살설의 근거와 사료가 실제로 말하는 것을 나누어 정리했다.

정조는 1800년 음력 6월 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 만 47세, 즉위 24년 만이었다. 개혁이 한창이던 시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고, 그 직후 정국이 급격히 뒤집혔기 때문에 독살설은 당대부터 존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 학계의 다수설은 병사다. 다만 독살설이 왜 사라지지 않는지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조는 무엇을 앓다 죽었나

기록상 사인은 등창, 즉 등에 난 큰 종기였다.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승하 약 보름 전인 6월 중순부터 종기 치료 기록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머리 부근과 등에 난 부스럼으로 시작해 점차 크게 번졌고, 고열과 극심한 통증이 동반됐다.

정조는 원래 종기를 자주 앓았다. 즉위 이후 여러 차례 종기로 고생한 기록이 남아 있고, 본인이 의학에 밝아 처방에 직접 의견을 내는 일이 잦았다. 항생제가 없던 시대에 큰 종기는 흔한 사망 원인이었다. 세균 감염이 전신으로 퍼지면 패혈증에 이른다.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보면 기록에 남은 증상 경과는 종기에서 시작된 감염성 질환의 전형에 가깝다.

논란이 집중되는 것은 마지막 며칠에 쓰인 처방이다. 어의가 연훈방이라는 처방을 올렸는데, 이는 수은 화합물인 경분을 태워 그 연기를 환부에 쐬는 방식이었다. 수은은 독성 물질이다. 다만 종기와 매독 계열 질환에 수은제를 쓰는 것은 당시 동아시아 의학에서 이례적인 처방이 아니었다.

독살설은 어디서 나왔나

독살설의 근거는 대체로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시점이다. 정조가 죽자 열한 살의 순조가 즉위했고,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 문제에서 정조와 대립해 온 벽파의 배후로 지목되던 인물이다. 이듬해인 1801년 신유박해로 남인 계열이 대거 숙청됐고, 1802년에는 정조의 친위 군영 장용영이 혁파됐다. 정조가 20여 년간 쌓은 정치 구조가 2년 만에 해체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죽음으로 이득을 본 쪽이 너무나 뚜렷하다.

둘째, 임종 직전의 정황이다. 정조가 위독할 때 정순왕후가 직접 병실에 들어갔고, 그 자리에 다른 신하들이 물러나 있었다는 기록이 야사류에 전한다. 왕의 임종 순간에 특정 인물만 곁에 있었다는 서술은 의심의 재료가 되기 쉽다.

셋째, 연훈방의 수은이다. 독살설을 지지하는 쪽은 수은 훈증이 사실상 독을 쓴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 처방을 올린 어의 심인은 정조 사후 처형됐는데, 이 역시 입막음으로 해석되곤 한다. 반론은 심인의 처벌이 왕을 살리지 못한 어의에 대한 관행적 문책이라는 것이다.

넷째,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인사들의 글과 몇몇 야사에 정조의 죽음을 석연치 않게 본 정황이 남아 있다. 다만 이는 명시적인 독살 주장이라기보다 정국 급변에 대한 회한에 가깝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독살설이 대중적으로 확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90년대 이후 일부 저술과 사극이 이 가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널리 알려졌다.

사료를 그대로 읽으면 무엇이 보이나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진료 기록은 상당히 상세하다. 그리고 그 기록은 은폐된 죽음보다는 공개적으로 관리되다 실패한 치료 과정에 가깝다.

정조의 병세는 여러 신하가 참석한 자리에서 논의됐고, 처방과 증상 변화가 날짜별로 남아 있다. 정조 본인이 자기 상태를 설명하고 처방에 관여한 발언도 기록에 있다. 독살을 계획했다면 이렇게 다수가 지켜보는 상태에서 보름에 걸쳐 진행할 이유가 없다.

수은 훈증이 쇠약한 환자에게 해로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살해 의도의 증거인지, 당시 의학 수준에서 최선이라 믿고 쓴 처방이 역효과를 낸 것인지는 구분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 연구자 다수는 후자로 본다. 즉 정조는 종기에서 비롯된 감염으로 사망했고, 당대 의술이 그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독살설을 완전히 반증할 방법도 없다. 시신은 남아 있지 않고, 기록은 궁중이 남긴 기록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런 설이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

왜 이 질문은 계속 돌아오는가

독살설이 끈질기게 살아남는 진짜 이유는 의학적 정황이 아니라 상실감이다.

정조가 죽은 뒤 조선은 세도정치의 시대로 들어갔다. 규장각의 학문 기반도, 장용영의 군사력도, 화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구상도 이어지지 못했다. 조선이 근대와 만나기 전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개혁의 동력이 그 시점에서 끊겼다는 감각이, 그의 죽음을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한 사람이 죽었다고 20년의 개혁이 2년 만에 되돌려질 수 있는 체제라면, 그 개혁은 애초에 얼마나 튼튼했는가. 정조의 개혁은 제도가 아니라 정조라는 개인에게 매달려 있었다. 독살이든 병사든, 그 구조 자체가 이미 취약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조유신』이 다루는 것이 정확히 그 취약함이다. 2027년의 과학자가 1795년의 조선에 도착해 산업 기반을 세우고 관료를 길러 낸 뒤, 결국 자신이 훈련시킨 그 관료들에게 밀려나는 이야기다.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성공한 사람이 왜 그 시스템에게 버려지는지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