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기술
정약용의 거중기는 실제로 얼마나 쓸모 있었나
거중기는 수원화성 공사에 실제로 투입된 기중기다. 그 원리와 효과, 그리고 조선에 남지 못한 이유를 정리했다.
거중기는 정약용이 1792년에 설계해 수원 화성 공사에 실제로 투입된 기중기다. 도르래를 겹쳐 써서 사람의 힘을 수십 배로 증폭시키는 장치로, 무거운 성돌을 적은 인원으로 들어 올리는 데 쓰였다. 교과서에 빠짐없이 등장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작동했고 실제로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덜 알려져 있다.
거중기는 무엇을 하는 기계였나
거중기의 원리는 복합 도르래다. 고정도르래는 힘의 방향만 바꾸고, 움직도르래는 힘의 크기를 절반으로 줄인다. 움직도르래를 여러 개 연결하면 필요한 힘은 계속 줄어든다. 대신 줄을 그만큼 길게 당겨야 한다. 힘을 줄이는 대신 거리를 늘리는, 지렛대와 같은 교환이다.
정약용의 거중기는 위쪽에 도르래 네 개, 아래쪽에 도르래 네 개를 배치하고 하나의 밧줄로 엮은 구조였다. 밧줄 끝은 물레와 비슷한 얼레에 감겨 있어서, 몇 사람이 얼레의 손잡이를 돌리면 아래쪽 도르래에 매단 돌이 들어 올려졌다.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가한 힘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무게를 다룰 수 있었다.
거중기만 쓰인 것은 아니다. 화성 공사에는 함께 고안된 녹로와 유형거가 동원됐다. 녹로는 높은 기둥에 도르래를 달아 돌을 성벽 위쪽으로 끌어올리는 장치이고, 유형거는 무거운 자재를 채석장에서 공사장까지 나르는 수레다. 세 장치는 각각 들어 올리기, 높이 올리기, 옮기기를 나눠 맡았다. 실제 공사에서 자재 운반의 부담을 가장 크게 덜어 준 것은 오히려 유형거였다는 평가도 있다.
정약용은 이것을 어떻게 설계했나
정약용은 무에서 이것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는 정조에게서 성 축조 방안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때 왕이 내려 준 책이 『기기도설』이었다.
『기기도설』은 17세기 초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요하네스 테렌츠와 중국인 학자 왕징이 함께 펴낸 서양 기계학 서적이다. 도르래, 지렛대, 나사, 기어 같은 기계 요소의 원리와 그림이 실려 있었다. 정약용은 이 책의 도해를 참고해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와 목공 기술로 만들 수 있는 형태로 다시 설계했다.
이 과정 자체가 주목할 만하다. 조선의 지식인이 서양 기계학 서적을 읽고, 그것을 국가 사업의 실제 현장에 적용 가능한 물건으로 번역해 냈다. 도입에서 실물 제작, 현장 투입까지 몇 년 안에 이뤄졌다. 조선이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였다는 통념과는 맞지 않는 사례다.
거중기는 공사비를 얼마나 줄였나
가장 널리 인용되는 수치는 4만 냥이다. 정조가 화성 공사를 마친 뒤 거중기 덕분에 경비 4만 냥을 절약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화성 공사 총액이 약 87만 냥이었으니 4~5퍼센트에 해당한다.
다만 이 수치를 곧이곧대로 읽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절감액의 산출 근거가 명시돼 있지 않고, 신하와 신기술을 치하하는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이다. 거중기 자체가 몇 대나 제작돼 얼마나 오래 가동됐는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충분치 않아, 실제 투입 규모는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제한적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럼에도 화성이 10년 예정이던 공사를 2년 8개월 만에 끝냈다는 사실은 남는다. 이 속도는 거중기 한 대의 성능이 아니라, 새 장치와 임금 노동과 상세한 회계 기록이 결합된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거중기는 그 조합의 상징이지 전부는 아니었다.
왜 거중기는 조선에 남지 않았나
화성이 완공된 뒤 거중기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이후 조선의 대형 공사에서 이 장치가 표준 장비로 자리 잡았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왜인가.
첫째, 거중기는 특정 공사를 위해 만들어진 일회성 장비였다. 계속 쓸 곳이 있어야 기술은 개량되고 전승된다. 화성 이후 그만한 규모의 국가 토목사업은 없었다.
둘째, 기술을 이어받을 조직이 없었다. 거중기를 설계한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되어 18년을 강진에서 보냈다. 화성 공사에서 축적된 경험은 『화성성역의궤』라는 문서로는 남았지만, 그 기술을 계속 다루고 개량하는 상설 기구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셋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조선에는 이런 기계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를 만들어 낼 산업이 없었다. 기중기는 그것을 매일 쓸 광산과 항만과 공장이 있을 때 발전한다. 수요가 없는 기술은 아무리 잘 만들어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한다.
거중기의 진짜 교훈은 조선이 기술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만들었고, 작동했고, 그리고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술 도입의 병목은 설계가 아니라 그 기술을 계속 쓰게 만드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
『정조유신』의 주인공 한주혁이 1795년의 조선에서 가장 먼저 부딪히는 벽이 이것이다. 그는 21세기의 지식을 갖고 있지만, 만든 물건을 계속 굴러가게 할 사람과 조직이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삼척에 세운 과학혁신기구가 기계 공방이 아니라 사람을 길러 내는 기관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훗날 그 자신을 밀어내는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