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조선
정조는 왜 수원에 화성을 지었나
수원화성은 아버지를 위한 무덤도, 단순한 방어 요새도 아니었다. 정조가 계획한 것은 조선의 두 번째 수도였다.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에 착공해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둘레 약 5.7킬로미터, 공사 기간 2년 8개월, 투입된 비용은 약 87만 냥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국가 재정 규모를 생각하면 대단히 큰 사업이었다. 정조는 왜 이 돈과 시간을 성 하나에 썼는가.
정조가 수원에 성을 쌓은 직접적인 이유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이장이었다. 정조는 1789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 영우원을 수원부 화산 자락으로 옮기고 이름을 현륭원으로 고쳤다. 당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자리였다.
문제는 그 자리에 이미 수원부의 읍치, 즉 관아와 민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무덤을 들이려면 고을 자체를 옮겨야 했다. 정조는 팔달산 아래로 수원부를 통째로 이전시키고, 옮겨 간 주민들에게 보상과 이주 자금을 지급했다. 화성은 바로 그 새로 옮긴 고을을 둘러싼 성곽이다.
그러니 "아버지 묘를 지키려고 성을 쌓았다"는 설명은 절반만 맞다. 무덤 이장은 계기였고, 성은 그 계기 위에 세워진 훨씬 큰 계획의 외피였다.
화성은 무덤이 아니라 신도시였다
화성 사업의 본체는 성벽이 아니라 도시였다. 정조는 새 수원에 사람과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연달아 내놓았다.
먼저 국고에서 자금을 내어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점포를 열게 했다. 시전을 설치해 상업 기반을 만들고, 저수지를 파고 국영 농장을 두어 농업 생산 기반을 갖췄다. 화성 북쪽의 만석거, 서쪽의 축만제 같은 저수지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도로를 정비해 삼남으로 향하는 물류를 이 도시로 통과시켰다.
즉 정조는 성곽 공사를 하면서 동시에 상업·농업·물류를 갖춘 계획도시를 설계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이 정도 규모로 도시를 새로 만든 사례는 한양 건설 이후 사실상 처음이었다.
정치적 의도도 분명했다. 한양은 노론이 뿌리내린 도시였다. 정조가 개혁을 밀어붙이려 할 때마다 부딪힌 저항은 이 도시의 인적·경제적 네트워크에서 나왔다. 화성은 그 네트워크 바깥에 만들어지는, 국왕이 직접 설계하고 국왕에게 직접 연결된 도시였다. 여기에 자신의 친위 군영인 장용영의 외영을 배치했다. 정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화성으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내비쳤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2년 8개월 만에 완공한 방법
당초 계획은 10년이었다. 실제로는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첫째는 설계였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성 축조 방안을 미리 연구시켰고, 정약용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기술서 『기기도설』을 참고해 거중기와 녹로를 고안했다. 무거운 성돌을 적은 인력으로 들어 올리는 장치였다. 수레인 유형거도 함께 만들어 자재 운반 효율을 높였다.
둘째는 노동 방식이었다. 조선의 대형 토목공사는 백성을 부역으로 동원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화성에서는 달랐다. 전국에서 모집한 기술자와 인부에게 일한 만큼 품삯을 지급했다. 석수, 목수, 미장이 등 직종별 인원과 지급 내역이 남아 있다. 임금을 받는 노동은 부역보다 작업 속도가 빨랐고, 숙련 기술자를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셋째는 기록이었다. 공사가 끝난 뒤 편찬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자재 단가, 인부 명단과 임금, 공정, 도면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회계를 공개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중간에서 빼돌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 책이 있었기에 한국전쟁으로 크게 파손된 화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고, 그 복원의 정확성이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근거가 됐다.
그래서 화성은 성공한 계획이었나
성곽은 완성됐고 도시는 남았다. 그러나 정조가 화성에 걸었던 정치적 구상은 완성되지 못했다.
정조는 화성이 완공된 지 4년 뒤인 18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화성을 떠받치던 장용영은 1802년에 혁파됐다. 화성으로 흘러들던 재정과 인력은 끊겼다. 도시는 남았지만 그 도시를 지탱하도록 설계된 제도는 몇 년 만에 해체됐다.
여기서 남는 질문이 있다. 화성이 보여 준 것은 조선이 대규모 공사를 관리할 행정 역량, 임금 노동을 조직할 능력, 신기술을 실전에 투입할 유연성을 모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역량이 있었는데도 조선은 왜 이 방식을 다른 곳으로 확산시키지 못했는가. 화성은 조선이 할 수 없었던 일의 증거가 아니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의 증거에 가깝다.
『정조유신』은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2027년의 과학자 한주혁이 1795년의 조선에 떨어져 삼척에 연구단지를 세울 때, 그가 참고하는 선례가 바로 화성이다. 이미 조선이 한 번 해낸 방식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그리고 밀어붙였을 때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엇으로 변하는지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