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유신 제6부 경위(經緯)
27화제37장 셈틀
기계는 곧 조선의 셈을 통째로 삼켰다.
보험 — 『조선생사표』의 갱신 주기가 십 년에서 한 해로 바뀌었다.
세금 — 토지대장과 소득 신고가 대조 가능해졌다. 탈세가 처음으로 잡혔다.
철도 — 화차 하나하나의 위치와 적재량이 매일 집계되었다.
전쟁 — 포탄이 어디 떨어지는지를 미리 계산하는 사표(射表)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람 — 제국 어디에 누가 사는지가 상자 안에 들어갔다.

기계는 세 번 세대가 바뀐다.
제1대, 무진년(1868) — 톱니와 전자석. 초당 반 장.
제2대, 무술년(1898) — 계전기(繼電器) 방식. 초당 열 장. 그리고 처음으로 조건 분기가 들어갔다. 만약 이러하면 저기로 가라. 이 기계는 판단을 했다.
제3대, 을축년(1925) — 진공관. 초당 이천 장. 조선은 이것을 화기(火機)라 불렀다. 열이 많이 나서였다.
제3대의 첫 번째 임무는 포탄의 궤적 계산이었다. 두 번째는 암호 해독이었다. 세 번째는 원자핵이 쪼개질 때 튀어나오는 것들의 확률 계산이었다.
세 번째가 뒤에 세계를 끝낸다.
경자년(1900), 제국 통계원은 지구상의 어떤 기관도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갖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 일억 이천만 명의 개인 기록.
조선 본토, 만주, 연해주, 대만, 류큐, 일본, 인도차이나 북부, 보르네오, 남양 군도. 경위권 전역의 인구가 구멍 뚫린 종이로 상자 안에 있었다.
그것으로 조선은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콜레라. 무자년(1888) 벵골에서 시작된 유행이 조선 항구에 닿았을 때, 통계원은 나흘 만에 감염자의 이동 경로를 재구성하고 열이틀 만에 차단선을 그었다. 조선 본토 사망자는 이천이백 명이었다. 같은 유행으로 러시아에서 삼십만 명이 죽었다.
기근. 갑오년(1894) 만주 흉작. 통계원이 수확 신고와 곡물 재고와 철도 수송 능력을 대조해 이 개월 뒤의 부족량을 예측했고, 조선은 미리 사들였다. 죽은 사람이 없었다.
교육.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가 어느 마을에 몇인지 알게 되자, 학교가 그 마을에 세워졌다. 기해년(1899) 경위권 전역의 문해율이 육십일 퍼센트가 된다. 같은 시기 러시아는 이십팔, 인도는 육이었다.
그리고 나쁜 일도 했다.
신축년(1901), 남양 군도 인광석 채굴 노무 배정.
인광석은 새똥이 굳은 것이다. 캐면 먼지가 나고 그 먼지가 폐에 쌓인다. 규폐증과 비슷한 병이 생긴다. 조선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조선생사질병표』에 기록되어 있었다.
노동자를 어디서 데려올 것인가.
통계원이 답을 냈다. 문서 번호 통-신축-이사칠. 두 쪽이다.
— 배정 원칙 세 가지를 제안하옵니다.
一. 조선 본토인은 배정하지 아니한다. 본토 노무자의 평생소득 현재가치가 높아 손실이 크옵니다.
二. 문해자는 배정하지 아니한다. 문해자는 대체 비용이 높사옵니다.
三. 부양가족 수가 적은 자를 우선한다. 유족 보상액이 적사옵니다.
— 위 세 원칙에 따라 산출한 최적 공급지는 남양 군도 현지 및 보르네오 내륙이옵니다. 예상 연간 사망률 사 퍼센트, 십 년 누적 사망 약 이만 이천 명, 총 보상 비용 은 삼십일만 냥이옵니다.
— 같은 작업을 본토인으로 수행할 경우 총 비용은 은 사백이십만 냥이옵니다.
— 차액은 은 삼백팔십구만 냥이옵니다.
이 문서는 이백 년 동안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문제 삼을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계산에 틀린 데가 없었다. 자료는 정확했고, 방법론은 엄밀했으며, 결론은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이백 년 뒤 국립사료원의 정리관은 이 문서 사본을 부록 제6권에 실으면서 이렇게 주석을 단다.
— 이 문서를 읽고 나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 문서에는 악의가 없다.
— 오십일 년 전, 통계원의 초대 원장 남정후는 광군의 목숨값을 이백사십 냥으로 정하면서 각서에 이렇게 적었다. "값이 매겨지면 그것은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셈에 밝은 누군가는 장치를 달지 않는 쪽을 고를 것이다. 나는 그런 자가 나올 것을 안다. 그가 쓰는 표를 만든 자가 나였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 신축년의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은 통계원 사무관 남기환(南基煥)이다.
— 남정후의 손자다.
『대서양협약(大西洋協約)』 전문(前文), 1886년 5월 12일, 브뤼셀
— 우리 서명국들은 지난 삼백 년 동안 서로 싸워 왔다. 우리는 오늘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우정 때문이 아니다. 산수 때문이다.
서양이 뭉치는 데 스물세 해가 걸렸다.
1863년 손힐 서기관의 각서가 묵살된 뒤, 유럽은 각자 뒤쫓았다.
영국은 1870년에 국가과학위원회를 만들었다. 프랑스는 1872년에 고등연구원을 확장했다. 프로이센은 1871년 통일 직후 국립물리기술연구소를 계획했다. 미국은 1875년에 국립표준국 설립 법안을 발의했다.

각자 했다.
그리고 십오 년 동안, 넷 다 조선과의 격차가 벌어졌다.
이유는 단순한 산수였다. 조선의 국가 연구 예산은 세입의 이십분의 일이었고, 조선 세입은 그 사이에 여섯 배가 되었다. 영국의 연구 예산은 세입의 이백분의 일이었다. 프랑스는 삼백분의 일이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숨겼다.
프랑스의 야금 연구소가 알아낸 것을 영국이 몰랐고, 프로이센의 화학자가 알아낸 것을 미국이 몰랐다. 넷이 같은 실패를 각각 했다.
조선은 하나의 장부를 썼다.
전환점은 1884년 이집트였다.
영국이 수단에서 마흐디군에 밀리고 있을 때, 마흐디군이 조선제 강선 소총을 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어디서 왔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오스만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았다.
같은 해 영국 재무성이 다른 보고를 받는다. 런던 금융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아시아 관련 결제의 육십사 퍼센트가 조선 경위결제망을 통과하고 있으며, 영국 정부는 그 거래 내역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조선 자본이 들어간 철도가 개통되었다. 궤간은 조선 표준이었다.
세 사건이 여섯 달 안에 일어났다.
1885년 겨울, 런던 다우닝가에서 비밀 회합이 열렸다.
참석자는 다섯이었다. 영국 외무장관, 프랑스 외무장관, 독일 제국 재상 대리, 미국 국무장관 특사, 러시아 재무대신.
기록에 따르면 회합은 첫날 여섯 시간 동안 아무 진전이 없었다. 다들 상대를 믿지 않았다.
둘째 날 아침, 독일 측이 서류 하나를 탁자에 올렸다.
조선 제국 과학원의 연구 예산 추계였다. 첩보로 얻은 것이었다.
숫자는 이러했다.
| 국가 연구 예산 (백만 파운드 환산, 1885) | |
|---|---|
| 조선 | 31.4 |
| 영국 | 2.1 |
| 프랑스 | 1.7 |
| 독일 | 2.4 |
| 미국 | 0.9 |
| 러시아 | 0.4 |
| 서양 5개국 합계 | 7.5 |
독일 재상 대리가 말했다.
— 여러분. 우리 다섯이 가진 것을 전부 합쳐도 저들의 사분의 일입니다.
— 우리가 각자 하는 한, 우리는 각자 집니다.
『대서양협약』은 1886년 5월 12일 브뤼셀에서 서명되었다.
본문은 열네 조였고, 실질적인 내용은 다섯이었다.
一. 공동 연구. 서명국은 물리·화학·야금·전기·의약 다섯 분야에 공동 연구소를 설립한다. 소재지는 각각 다르나 자료는 공유한다.
二. 특허 공유. 서명국 국민의 특허는 서명국 전역에서 자동으로 유효하며, 서명국 정부는 국방 목적으로 이를 무상 사용할 수 있다.
三. 통계 통일. 서명국은 출생·사망·질병·산업 생산의 등록을 의무화하고 동일한 양식을 쓴다.
四. 표준 통일. 서명국은 도량형, 철도 궤간, 전기 규격, 나사 규격을 통일한다. 조선 규격은 채택하지 아니한다.
五. 대조선 조치. 서명국은 조선에 전략 물자를 판매할 때 사전에 협의한다. 대상 품목은 유황, 고무, 석유, 역청탄, 백금, 주석, 텅스텐, 초석이다.
다섯째 조항이 뒷날 전쟁이 된다.
협약에는 서명되지 않은 여섯 번째 항목이 있었다.
회의록에만 남아 있고, 조문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우리는 이것을 무엇을 위해 하는가.
이 논의에 이틀이 걸렸다.
영국 대표가 말했다. — 우리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요.
프랑스 대표가 반박했다. — 그 말로는 우리 국민을 설득할 수 없소. 우리 국민은 당신네 제국이 무너지기를 바라오.
러시아 대표가 말했다. — 그러면 무엇으로 설득하오. 저들은 우리를 침략하지 않았소. 저들은 우리에게 좋은 물건을 싸게 팔고 있소. 우리 백성은 조선 약으로 아이를 살리고 조선 유리로 창을 만드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가 무슨 말을 해야 하오?
방이 오래 조용했다.
마지막에 발언한 것은 미국 특사였다. 이름은 헨리 애덤스 클라크. 그때 마흔셋의 국무성 관리였고, 이 발언 하나로 역사에 남는다.
기록은 이렇다.
마지막에 발언한 것은 미국 특사였다. 이름은 헨리 애덤스 클라크. 그때 마흔셋의 국무성 관리였고, 이 발언 하나로 역사에 남는다.